1장 설탕과 노예무역

 

설탕의 기원

 

2011년 전 세계의 설탕 생산량은 약 1억 6천 8백만 톤이었다. 세계 인구가 약 70억이므로 1인당 연간 소비량은 24㎏이 된다. 1인당 설탕 섭취량은 전 세계적으로 지난 50년 동안 3배 증가했는데, 한국은 1976년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 6㎏에서 2007년 20㎏으로 증가했다.

한때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정제된 설탕은 현대에 들어 충치, 비만, 당뇨병을 초래하는 등 건강에 좋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 설탕 과다섭취로 인해 발병하는 질환은 고혈압, 심근경색, 췌장염, 비만, 간 기능 장애 등으로 만성 음주로 발병하는 질환과 대부분 일치한다고 한다. 설탕 과다섭취는 비감염성 질환의 큰 요인으로 지적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이래 암, 뇌혈관 질환, 신장 질환 같은 비감염성 질환이 전 세계 사망 원인의 60%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 3가지 질환은 2010년 국내 사망 원인 중 3대 주요 질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음식물에 설탕이 들어가므로 음식물 과다 섭취에 따른 문제이지 설탕 탓만 할 수 없다는 반론도 많다. 어떠한 음식물도 과다 섭취할 경우 건강에 해로우므로 특별히 설탕이 건강의 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설탕 제조에 쓰이는 식물은 사탕수수(sugar cane)와 사탕무(sugar beet)인데, 사탕무 재배는 19세기에 들어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전적으로 사탕수수로 설탕을 제조했다. 사탕수수는 연평균 기온 20℃ 이상에,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에 재배 가능한 열대작물로 다 자라면 키가 4.5m에 이른다.

식물학자들은 BC 8천년 경 태평양의 뉴기니(New Guinea) 섬 주민들이 최초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고 본다. 이어 BC 6천년 경 필리핀과 인도로 전파되었다. BC 326년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원정을 갔는데, 이때 그리스 군은 사탕수수를 알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장군 네아르코스(Nearchos)는 사탕수수를 가리켜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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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무

처음에는 사탕수수를 가공하지 않은 채로 씹어 단맛을 보았는데, 굽타 왕조 때인 AD 350년 경 인도인들은 결정체 형태의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6세기에는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에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조법이 전해졌다.

7세기 초 발흥한 이슬람 세력은 곧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을 석권하는 등 놀라운 속도로 대외 팽창을 했다. 711년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의 원정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진입했다. 이때 이베리아 반도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西고트(Visigoths) 족이 세운 서고트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이베리아를 석권한 이슬람 군은 717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침입했다. 그러나 732년 카알 마르탱이 지휘하는 프랑크 군은 현재의 프랑스 중부인 투르(Tour)와 푸아티에(Poitier)에서 이슬람 군을 격파하여 더 이상의 북진을 막았다(759년 이슬람 세력은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750년 이슬람권에서는 큰 변혁이 일어났으니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의 탄생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Muhammad)는 아랍의 쿠라이쉬(Quraish) 부족 출신인데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Muawiyah)는 비록 무하마드의 처남이었으나 부족이 달랐다. 시아파 무슬림은 무아위야가 세운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성이 없다고 보았다. 무하마드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인 압바스 이븐 압둘 무탈립(Abbas ibn Abd al-Muttalib)의 자손 아불 압바스(Abul al Abbas, 721~754)는 시아파와 페르시아인의 지지를 얻어 750년 현재 이라크 영내인 자브(Zab)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르완 2세(Marwan Ⅱ, 재위 744~750)가 지휘하는 군사를 격파하고 압바스 왕조를 세웠다. 바로 이 해에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의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2차 서역 원정이 있었다. 고선지는 천산산맥을 넘어 석국(石國: 타슈켄트)을 정복하고 그 국왕을 포로로 잡아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국 72개국이 당에 조공하였다. 당의 황제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어리석게도 석국 국왕을 처형했다. 이에 석국 왕자는 아불 압바스에 복수를 요청했다. 아불 압바스는 즉시 석국 왕자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당나라에 대항하여 중앙아시아에 파병했다. 751년 압바스 왕조의 원정군은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군 3만을 현재 카자흐스탄의 영내에 있는 탈라스에서 대패시켜, 이 지역을 이슬람권으로 귀속시켰다. 이때 당군 포로 가운데 제지 기술자가 있어 이슬람권에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포로 가운데 두환(杜環)은 아랍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762년 당으로 돌아갔다. 그는《경행기(經行記)》를 지어 자신의 진귀한 경험을 후세에 전했다.

이슬람권에서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법이 널리 전파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연안인 레반트(Levant) 지역과 동지중해 섬에도 사탕수수가 재배되었다(크레타는 820년대 후반, 시칠리아는 827년, 몰타는 870년 이슬람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동로마제국과 이슬람권이 688년부터 공유하였던 키프로스(Cyprus) 섬에서는 10세기에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잔지바르까지 이르는 지역에도 사탕수수가 전파되었다.

 

 

십자군과 설탕

 

설탕은 십자군 원정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셀주크 투르크(Seljuq Turk) 제국의 동로마 공격으로 야기되었다. 셀주크 왕조의 조상은 셀주크인데, 그는 투르크 족의 일파인 오우즈(Oghuz) 족에 속한 한 장군이었다. 셀주크는 960년 무렵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무 다리야 삼각주 지역인 호레즘에 정착하여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셀주크의 손자인 투그릴(Tughril, Tugrul)과 차그리(Chaghri)는 가즈나 왕조(Ghaznavid)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 승전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투그릴은 1055년에는 이란의 중앙 및 서부, 바그다드 일대를 지배하던 시아파의 부예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1063년 투그릴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이듬해 차그리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이 술탄이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1071년 소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Romanos Ⅳ, 재위 1068~1071)를 포로로 잡았다. 셀주크 투르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 로마노스 4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알프 아르슬란 : 내가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했겠소?

로마노스 4세 : 아마 당신을 죽이거나,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전시했을 것이오.

알프 아르슬란 : 나는 당신을 훨씬 무겁게 처벌하겠소. 당신을 용서하고 석방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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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알프 아르슬란은 일주일 만에 로마노스 4세를 석방했다. 그동안 군주로 예우하면서 강화 조건을 논의했다. 로마노스 4세는 안티오크(Antioch), 에데사(Edessa), 만지케르트를 셀주크 투르크에 할양했다. 이로써 셀주크 투르크는 소아시아 동부를 차지했다.

계속되는 셀주크 투르크의 서진에 동로마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대부분 잃고 지중해 해안 지역만 보유하게 되었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Alexios Ⅰ, 재위 1081~1118)는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곧 자신의 고향 프랑스로 건너가 원정을 위한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종교회의(Council of Clermont)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상대로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우르바누스 2세가 유럽 내에서의 폭력행위를 멈출 것을 호소하고, 비잔틴 제국의 원조 요청에 응하여 동부의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면 천국으로부터 보상이 있을 것이며, 도중에 죽더라도 모든 죄가 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정의로운 힘을 하느님은 물론 여러분과 관련된 또 다른 일에 써야 합니다. 동방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동포들에게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둘러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었듯이 투르크인과 아랍인들은 우리 동포를 공격하여 동로마 영토와 지중해 해안에다가 성 조오지(St. George)의 팔이라 불리는 헬레스폰트(Hellespont) 지역까지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기독교인의 땅을 점령하고 있으며, 이미 일곱 차례 전투에서 기독교인들을 이겼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고 포로가 되었고, 교회가 파괴되고 동로마 제국은 황폐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충실한 성도들은 더욱 그들의 침략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니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주 예수의 사자(使者)로서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병사, 기사, 빈자, 부자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 위험에 처한 기독교인들을 신속히 구원하고 그 사악한 종족들을 우리 벗들의 땅에서 몰아내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교황의 호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유럽의 많은 귀족과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다. 프랑스에서는 툴루즈 백작(Count of Toulouse) 레이몽 4세(Raymond IV), 프랑스 국왕 필립 1세(Philip I)의 아우 베르망두아 백작((Count of Vermandois) 위그 1세(Hugh I), 영국에서는 영국 국왕 윌리엄 2세(William II)의 동생 로버트 커토즈(Robert Curthose), 블루아 백작(Count of Blois) 스테판 2세(Stephen II), 플랑드르 백작(Count of Flanders) 로베르 2세(Robert II) 등이 참여했다. 십자군은 1096년 8월 유럽을 떠나 원정에 나섰다.

이때 셀주크 투르크는 말리크 샤 1세(Malik-Shah I, 재위 1072~1092) 사후 술탄 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의 내전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이집트 전역과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는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슬람권은 십자군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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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예루살렘 전투

 

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은 성공하여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을 거의 모두 학살했다. 1차 십자군 원정을 기록한 연대기《게스타 프랑코룸(Gesta Francorum)》은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교도들을 정복한 우리 병사들은 이교도 남녀를 엄청나게 잡아 죽이든, 포로로 삼든 마음대로 했다. …… 우리 지휘관들은 죽은 모든 사라센인(Saracen)을 성 바깥으로 던지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시체의 악취 때문이었다. 도시 전체가 그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살아남은 사라센인들은 시체를 성문의 출구로 끌고 가서 쌓아 놓았는데, 마치 가옥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교도가 이처럼 도살을 당한 것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화장(火葬)하는 데 쓰는 장작더미가 피라미드처럼 쌓였다. 하느님 말고는 얼마나 그들이 살해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원정에 성공한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은 논의 끝에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을 세웠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Baudouin)이 초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여러 문물을 목격했는데, 이 가운데 사탕수수가 인상적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던 한 군인은 사탕수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리폴리(Tripoli, 현재의 레바논에 위치) 평원의 들판에서 그들이 주크라(zukra)라고 부르는 꿀 갈대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갈대를 열심히 빨아먹는 데 익숙했으며, 그 맛있는 수액(樹液)을 즐겼다. 그 수액은 단맛이 나긴 했지만 전혀 물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주민들은 아마도 상당히 애써서 그 식물을 키우는 것 같았다.

 

예루살렘 왕국의 성립과 더불어 병원기사단(Knights Hospitaller)과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이 생겼다. 예루살렘은 초기부터 기독교의 성지였으므로 늘 순례하는 기독교도가 있었다. 이들을 위해 600년경부터 예루살렘에 병원 조직이 생겼는데,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군사적인 기사단 조직으로 개편되니 이것이 병원기사단이다. 요한기사단으로도 불리는 병원기사단은 예루살렘 왕국 방어 임무를 맡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전성기인 12세기 중반에도 현재의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영역을 지배하는데 불과한 작은 왕국이었다. 반면에 인근의 이슬람 세력은 강대했다.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서 이슬람교도 강도단에 재산과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1119년 성지 수호를 제창한 프랑스의 귀족 위그 드 파엥(Hugues de Payens) 아래 아홉 명의 기사들이 모여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예루살렘 왕국 국왕 보두앵 2세(Baudouin II de Jérusalem, Baldwin II of Jerusalem)는 그들의 거처로서 왕궁의 건물 한 채를 주었는데, 그곳은 예전에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지역이었다. 여기서 이 단체의 명칭인 ‘성전 기사단’이 생겨났다. 기사단의 단원 가운데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소수의 기사들을 제외한 이들은 재무관리를 했는데, 정복지의 설탕 생산 감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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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2세와 성전기사단

 

성전기사단은 십자군에 참여한 귀족들의 재산을 관리했고 성지 순례자들로부터 귀중품을 맡아 보관하고 신용장(letter of credit)을 주었다. 귀중품을 소지하지 않은 순례자들은 노상강도의 표적이 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안전하게 성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은행의 수표 발행과 같은 것으로 성전기사단의 재정수입에 큰 보탬이 되었다.

이슬람의 공세에 대항한 십자군 운동은 여러모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전기사단의 금융 활동은 어쩌면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일어서는 데 큰 기여를 한 금융제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설탕의 가치를 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Venezia, Venice) 공화국의 상인들은 12세기 초 현재의 레바논 영내에 위치한 티루스(Tyre) 인근에 몇몇 촌락을 획득하여 사탕수수를 재배 가공하여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지중해 동부의 두 섬인 크레타와 키프로스의 설탕 생산도 장악했다(동로마제국은 961년 크레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수복했으나 베네치아가 1212년 무렵부터 확고히 크레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설탕은 처음에는 후추, 계피, 정향(丁香), 육두구(肉荳蔲), 사프란(saffron) 등과 같이 향신료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당시 향신료는 희귀하고 값이 비싼 동방의 산물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향신료는 신분과 지위의 상징으로, 음식에 많이 넣어 손님을 대접할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영국의 헨리 3세(Henry III, 재위 1216~1272)는 1226년 윈체스터 시의 시장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산 설탕 3파운드(1.35kg)만 보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Edward I, 재위 1272~1307) 치세 때인 1287년에야 영국 왕실은 보통 설탕 677파운드, 자색 설탕 300파운드, 붉은 색 설탕 1900파운드를 소비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288년 영국 왕실의 설탕 소비는 급격히 늘어 6,258파운드(2835kg)나 되었다.

설탕이 희귀하던 시절, 설탕은 위신재(威信財)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세 이래 유럽의 왕이나 귀족은 연회를 베풀 때 설탕으로 성(城), 탑, 말, 기사 등 장식물을 만들어 과시했다. 지금도 결혼 피로연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층으로 쌓아올려 하얀 크림으로 장식한 장식용 케이크는 이런 관습의 유산이다.

 

 

신대륙의 설탕 생산

 

설탕 생산을 세계 곳곳으로 전파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포르투칼레 백작령(Condado de Portucale)을 기초로 하여 성장한 포르투갈 왕국이 1179년 교황의 승인을 얻어 탄생했다. 1249년까지 모든 이슬람 세력을 포르투갈에서 몰아낸 포르투갈 왕국은 15세기 들어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 활동을 시작했다.

1415년 7월 포르투갈 국왕 동 주앙 1세(Don João I, 재위 1385~1433)는 왕비와 왕자, 1만 9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200여척의 군함에 올라 세우타(Ceuta) 원정을 떠났다.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 맞은 편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무역항으로 비단, 상아, 금, 노예가 유통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포르투갈 군은 8월 세우타를 함락시켜 첫 해외 식민지로 삼았다. 1419년에는 무인도인 마데이라(Madeira) 섬을 발견하고 이듬해에 포르투갈인을 이주시켰다. 1427~1431년 사이 역시 무인도인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고는 1445년 포르투갈인을 이주시켜 영토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이들 섬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세웠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 의존했다.

포르투갈의 안타웅 곤살베스(Antão Gonçalves)가 최초로 기니아(Guinea) 지역에서 흑인 노예를 산 유럽인이었다. 곤살베스는 1441년 무인도인 사웅 투메(São Tomé) 섬을 발견했는데, 곧 이 화산섬이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곤살베스는 흑인 노예를 부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다.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Nicholas V)는 포르투갈의 동 아퐁소 5세(Don Afonso V, 재위 1438~1481)에게 이슬람교도와 이교도를 세습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 카톨릭 국가들은 이 칙령으로 노예무역을 합리화했다. 1482년 황금 해안에 세워진 엘미나 성(Elmina Castle)은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송하는 주요 중간 기착지가 되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 왕 동 마누엘(Don Manuel, 재위 1495~1521)은 강력한 함대를 조직하고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이는 동양에 무역기지를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창건한 것이다.

1500년 3월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1200명을 태운 13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 항을 출항해 남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 원정대는 4월 22일 브라질의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것이 최초의 브라질 발견은 아니었으나 포르투갈은 귀금속을 구하려 적극적으로 브라질에 탐사대를 보냈다.

1501년 가스파르 지 레모스(Gaspar de Lemos)기 지휘하는 원정대는 브라질이 섬이 아니고 거대한 대륙의 일부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귀금속을 찾지 못하고 대신 해안가에 브라질우드(Brazil wood)가 풍부한 것을 발견했다. 이 나무는 붉은색 염료를 추출할 수 있는데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고급 염료로 각광을 받았다. 유럽 상인들은 브라질우드를 인도에서 수입했는데, 포르투갈 탐험대가 신대륙에서 대규모로 자생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브라질이란 국명은 바로 이 나무에서 나왔다. 원주민들은 이 나무를 이비라비땅가(Ibirabitanga)라 불렀다.

브라질 원주민인 투피 족은 수렵, 채집, 고기잡이가 생업이었으며 여자들이 원시적 방법으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투피 족에게는 사유재산이나 상품 개념이 없었다. 이들은 이윤을 얻고 재산을 축적하려는 유럽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1557년 브라질을 방문한 프랑스 개신교도 장 드 레리(Jean de Léry)는 원주민 노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원주민 노인 : 당신네 나라에는 나무가 없소?

장 드 레리 : 브라질우드는 땔감이 아니라 염색에 쓰는 거요.

원주민 노인 : 그러면 그 나무가 왜 그리 많이 필요하오?

장 드 레리 : 우리나라에는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옷, 칼, 가위, 거울 등을 가진 상인들이 있소. 브라질우드를 우리나라에 가져가면 부유한 상인이 당신들이 좋아하는 물건과 바꾸어주오. 그는 매우 큰 부자요.

원주민 노인 : 당신이 말한 그 부자 말이오. 그 사람은 죽지 않소?

장 드 레리 : 그도 죽소.

원주민 노인 : 그렇다면 그의 재산은 누가 가지는 거요?

장 드 레리 : 그의 아들이 가지게 되오.

원주민 노인 : 당신들 프랑스인이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당신들은 바다를 건너와 불편하게 살면서, 당신들 자식이나 당신들보다 오래 살 사람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는구려. 당신들을 기른 땅은 후손도 먹일 만큼 기름지지 않소?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있소. 그러나 우리가 죽은 뒤에도 땅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먹여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걱정 없이 쉴 수 있소.

 

 

지나친 벌목으로 브라질우드가 고갈되자 포르투갈은 당시 가장 이윤이 크던 설탕을 브라질에서 생산하려 했다.

1530년 마르팅 아퐁소 지 소사(Martim Afonso de Sousa)가 이끄는 400여명의 식민 원정대가 5척의 배에 타고 브라질을 향해 떠났다. 동 주앙 3세는 소사를 새로운 땅과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법률 집행권, 공증인 임면권, 미개간지 분배권 등의 강력한 권한을 위임했다. 이 원정대는 프랑스인들을 축출하고 히우 다 프라타(Rio da Prata) 지역을 개발하여 식민 거주지를 세웠다. 또한 마데이라 제도에서 가져온 사탕수수 묘목을 재배했다. 이것이 브라질 사탕수수 재배의 시작이었다.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한 브라질에서 설탕 생산은 급증하여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 되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 식민지 브라질의 설탕 생산량은 무려 200만 아로바(arroba), 즉 29,400톤이나 되었다(1 arroba는 포르투갈에서는 14.7kg, 스페인에서는 11.5kg). 반면에 사웅 투메의 설탕 생산량은 1580년 20만 아로바(2940톤)를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본이 부족한 포르투갈은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했는데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본을 투자하고 설탕의 유럽 시장 유통을 주도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투피 족은 적합하지 않았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고된 노동을 감당할 만한 체력을 지니지 못했고 투피 족 남자들은 농사 자체를 여자의 일이라며 경멸했다.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로 삼아 부려도 강한 저항을 하고 지리에 밝아 도주하기 일쑤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투입했다.

 

훗날 스페인의 주축이 된 카스티야 왕국은 1402년부터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정복해 나갔다. 1479년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이 탄생했다. 스페인은 1495년까지 카나리아 제도 원주민의 저항을 물리치고 13개 섬을 확고히 장악했다. 정복이 완료된 후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에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1492년 1월 2일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해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 해 4월 17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와 신항로 개척 탐사를 후원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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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제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Don)’과 제독 자리를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쳤지만 결국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콜럼버스는 후원을 얻기 위해 그 동안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수년간 돌아다녔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는데 마침내 소원을 이룬 것이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 핀타(Pinta), 산타 클라라(Santa Clara) 등 3척의 배를 지휘하여 팔로스(Palos) 항에서 출항했다.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하여 보급을 받고는 9월 6일 다시 출항하여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10월 28일에는 쿠바에 상륙하여 탐사했다. 12월 5일에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에 상륙했다. 히스파니올라 섬은 면적이 76,480㎢로 오늘날의 아이티와 생 도미니크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히스파니올라 서부에 위치한 아이티 공화국은 면적이 27,500㎢로 히스파니올라 섬의 36%를 차지한다. 히스파니올라의 원주민은 타이노(Taino) 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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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 지도

저작자: Kmusser ,출처:위키피디아

 

1493년 콜럼버스는 17척의 선박과 1200여명의 선원들과 더불어 2차 항해를 떠났다. 이때 사탕수수 종자를 가지고 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에 있는 항만 지역인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선원 1천 2백 명이 히스파니올라에 정착했다.

스페인은 카리브 해 전역을 자국 영토라 주장했으나 히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1508), 자메이카(1509), 쿠바(1511), 트리니다드(1530)에만 정착촌을 건설할 수 있었다.

원주민인 타이노 족은 고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백인들이 가지고 온 세균에 면역성이 없어 전염병으로 무수히 죽어갔다. 스페인 식민당국은 아프리카 흑인의 노동력을 이용, 사탕수수를 경작하려 했다. 1501년 최초의 흑인 노예가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했다. 스페인인들은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에서 흑인 노예를 이용,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다.

 

17세기에 들어 영국과 프랑스가 설탕을 대량 생산하게 되어 포르투갈의 설탕 독점이 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카리브 해의 일부를 차지하여 식민지로 만들고는 대거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다.

스페인 식민지 히스파니올라의 야카나구아(Yacanagua) 정착지는 1543년 프랑스 해적에 의해 파괴되었다. 1592년에는 크리스토퍼 뉴포트(Christopher Newport)가 지휘하는 4척의 영국 함대가 수병 110명을 상륙시켜 야카나구아 정착지의 주택 150채 전부를 파괴했다.

20년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시달린 스페인은 1595년 네덜란드 항구를 봉쇄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주요 산업인 청어 가공에 필요한 소금 공급을 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교역하여 소금을 공급받았다. 식민지 주민들은 국익보다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했으므로 쾌히 응했다.

1605년 히스파니올라 북부와 서부 해안에 세워진 스페인 정착촌들이 네덜란드․영국과 대규모로 밀무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에 격분하여 스페인 당국은 야카나구아 정착지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산토 도밍고 시 인근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재정착한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고 많은 노예들이 탈주했다.

스페인 군은 히스파니올라의 13개 정착촌 가운데 5개를 파괴했는데, 오히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이 자유로이 히스파니올라의 북부와 서부 해안에 기지를 세우게 되었다.

1625년 프랑스 해적들은 히스파니올라 섬 북쪽에 인접한 작은 섬인 토르투가(Tortuga) 섬에 정착촌을 세웠는데, 곧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과 사략선(privateer) 업자들도 토르투가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정착촌의 주민들은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고 섬에 사는 들소를 사냥해 의식주를 해결했다.

1635년 프랑스인 550여 명이 카리브 해 소(小) 안틸레스 제도(Lesser Antilles)의 두 섬,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과 과들루프(Guadeloupe) 섬에 상륙하여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담배와 면화를 재배했으나 곧 수익성이 훨씬 높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해군이 1629년, 1635년, 1638년, 1654년 4차례에 걸쳐 토르투가에 건설된 해적들의 정착촌을 파괴했어도 곧 재건되었다. 1655년 자메이카의 영국 식민청은 엘리아스 와츠(Elias Watts)가 토르투가를 재점령하는 것을 후원하고 그를 총독(Governor)으로 임명했다.

1660년 영국정부는 프랑스인 제레미 데샹(Jeremie Deschamps)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제레미 데샹이 영국의 국익을 수호한다는 조건으로 임명한 것이었으나 곧 큰 실수로 판명되었다. 데샹은 토르투가 섬이 프랑스령이라 선포하고 프랑스 국기를 내걸었다. 영국은 수차례 해군을 보내어 섬을 점령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664년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는 토르투가를 프랑스령이라 공식 선포하고 프랑스 서인도회사가 이 섬을 경영하도록 했다.

1697년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은 레이스베이크 조약(Treaty of Ryswick)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묵시적으로 히스파니올라 섬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부 지역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인정했다. 프랑스는 이곳에 생 도맹그(Saint-Domingue)라는 이름을 붙였다(이 지역이 현재의 아이티 공화국이다). 이 무렵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담배 플랜테이션, 면화 플랜테이션, 카카오 플랜테이션이 세워졌고 아프리카로부터 노예 수입도 활발해졌다.

생 도맹그의 설탕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는데, 1767년에는 설탕 원당 7천 200만 파운드(3만 2천 600톤), 설탕 5천 100만 파운드(2만 3천 100톤)를 유럽에 수출했다. 설탕 생산으로 프랑스 국부(國富)의 원천이 된 생 도맹그는 ‘안틸레스 제도의 진주(Pearl of the Antilles) 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안틸레스 제도는 대 안틸레스 제도(Greater Antilles)와 소 안틸레스 제도로 나뉘는데 쿠바, 히스파니올라,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 섬은 대 안틸레스 제도에 속한다.

1780년대에 생 도맹그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 커피의 60%를 생산했다. 이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설탕과 커피 생산량 전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량이었다. 18세기 프랑스의 번영은 생 도맹그, 마르티니크 등 카리브 해 식민지에서 나왔다.

 

1627년 80명의 영국인들이 카리브 해 소 안틸레스 제도 가운데 하나인 바르바도스(Barbados) 섬에 처음으로 정착했다. 바르바도스는 길이가 34km, 넓이가 23km인 작은 섬이다. 1640년 바르바도스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영국의 설탕 생산에서 전환점이었다. 1642년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으로 내전이 벌어져 이를 피해 바르바도스로 이주하는 영국인이 많아졌는데, 1644년 바르바도스 인구는 3만 명으로 추정된다. 1655년 바르바도스에서는 흑설탕 6,667톤이 생산되었는데, 청교도 혁명으로 집권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이 해에 함대를 보내 히스파니올라의 스페인 식민도시 산토 도밍고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대신 스페인령인 자메이카를 점령했다.

자메이카는 면적이 약 10만㎢ 제곱킬로미터로 바르바도스 섬보다 30배나 컸다. 자메이카에 사탕수수를 재배한 영국은 곧 북유럽 시장에서 포르투갈을 능가하게 되었다. 1675년에는 영국 선박 400척이 한 척당 평균 150톤의 설탕을 싣고 영국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50% 정도가 유럽 대륙으로 수출되었다.

 

 

설탕과 노예무역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질병(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등) 유입으로 인한 대규모 희생으로 1560년대에 이르면 원래 인구의 1/10 수준으로 감소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망률이 너무 높아지자 1512년 스페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등 여러 모로 보호하는 부르고스 법(Laws of Burgos)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부르고스 법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19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북아메리카의 연안항구들에 흑인 노예를 데려왔다. 바로 이 해에 영국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 제임스타운에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개발하면 할수록,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는 흑인 노예무역에서 패권을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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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 초기의 노예 시장.

 

노예무역의 최종 승자는 영국이었다.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Ⅱ, 재위 1660~1685)는 1660년 즉위하자마자 왕립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n Company)를 설립하여 스스로 노예무역에 앞장섰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국왕이 준 아프리카 노예무역 루트 통제 특허장을 가지고 영국 노예무역을 독점했다. 1672~1689년 사이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공급한 노예 수는 대략 9만 명이었다. 이중 절반 정도가 바르바도스, 3분의 1 정도가 자메이카의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보내졌다. 1698년에야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아프리카 노예무역 독점이 폐지되었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1731년에 노예무역을 포기하고 대신 상아와 사금을 무역했다.

흑인들이 세운 왕국이 주요 흑인 노예 공급자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내륙 지리를 잘 모르고 질병을 겁낸 유럽인들이 직접 노예사냥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오요 제국(Oyo empire), 콩 제국(Kong Empire), 다호메이 왕국(Dahomey Kingdom), 푸타 잘롱 왕국(Kingdom of Fouta Djallon), 푸타 투로 왕국(Kingdom of Fouta Tooro), 코야 왕국(Kingdom of Koya), 카소 왕국(Kingdom of Khasso), 카부 왕국(Kingdom of Kaabu) 등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이 부족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다른 흑인들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아 유럽인에게 노예로 팔았다.

오늘날의 베냉 공화국인 아프리카의 다호메이 왕국에서는 노예사냥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다호메이 왕국은 1472년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 협정을 맺어 전쟁 포로를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 다호메이 왕국은 16, 17세기에 유럽과의 노예무역으로 부유해졌다. 다호메이 왕국의 노예 수출은 17세기 초 매년 2만 명이었다가 19세기 초에는 1만 2천으로 감소했다.

아프리카 원주민은 백인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1795~1797년 사이 아프리카 내륙을 여행했던 스코틀랜드 의사 멍고 파크(Mungo Park)는 종종 노예로 잡히는 아프리카 내륙의 원주민들이 백인에 품고 있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들 모두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엄청 많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인종인지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들은 노예들이 소금물(바다)을 건넌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땅을 경작하는데 고용되었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믿지 않으려 했다.……. 백인들이 흑인을 사서 잡아먹는다는 관념이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내륙에서) 해안으로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노예를 매개로 대서양에서 삼각무역이 형성되었다. 영국 배가 각종 상품들(직물, 총, 철, 술, 장신구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노예와 교환하여, 이들을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 판매하고 사탕수수, 면화, 인디고, 당밀 등을 구입해 영국으로 귀환하는 식이었다. 노예 수송과 항구에서의 격리수용 등의 과정에서의 사망자(운송 도중 사망하는 노예가 생존자의 3배 규모)는 엄청났다. 백인 선원들마저 항해 도중 약 20%가 죽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18세기에 절정을 맞았다. 18세기 중엽 리버풀의 노예무역은 영국 무역 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1783~1793년 리버풀의 노예판매 총액은 1,500만 파운드, 이 중 순수익은 1,200만 파운드로 이익률이 80%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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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피트소(1795년)

아버지 월리엄 피트 대

노예무역이나 설탕 재배에는 큰 이익이 따랐으므로 설탕 농장주나 관련 상인 가운데에 엄청난 부를 쌓는 이들이 나왔다. 이들의 부는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는데 영국의 조지 3세(George Ⅲ, 재위 1760~1820)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설탕 농장주의 화려한 마차를 보고는 옆에 앉은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수상에게 “관세 수입은 어찌 되고 있소? 관세 수입은!”이라고 물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런데 노예무역에 관해 이러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유럽인들은 왜 머나먼 대서양 건너편으로 아프리카 사람을 끌고 가 노예로 부려 먹었는가? 아프리카에 사탕수수 농장을 세워 아프리카인을 바로 노예로 썼으면 운송 도중에 희생도 없고 더 이익이 났을 텐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보다 훨씬 더 일찍, 그러니까 로마시대부터 아프리카를 알았다. 지리적인 조건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아도 아프리카 현지에서 아프리카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더 타당했다. 그런데도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무역이 생긴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 질병 때문이었다. 유럽인들은 각종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유럽의 질병인 천연두나 홍역에 면역력이 있었는데 비해, 유럽인들은 말라리아, 황열병 등 아프리카의 풍토병에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가의 극히 일부 지역에만 정착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침투한 것은 세균학이 발달한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노예무역 폐지

 

유럽에서 설탕 소비에 선두를 달린 나라는 영국인데, 영국에서 설탕이 서민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중엽 이후이다. 17세기 초 영국의 설탕 수입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166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국 전체 수입량의 10%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인 1770년 무렵에는 설탕 수입량이 1660년의 4배로 늘어났다. 1775년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프랑스의 2.5배였다. 이때 프랑스 인구가 영국의 4배였으므로 영국인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프랑스인의 10배나 되었다. 이는 홍차, 커피의 보급과 깊은 관계가 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지만 영국인들은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는다. 이는 처음에 차와 설탕이 모두 희귀한 위신재였기 때문이다. 차와 설탕이 저렴해짐에 따라 영국 서민들도 상류층의 관습을 모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이를 따라했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홍차가 아닌 포도주를 즐겼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단맛에 대한 선호도가 영국인보다 많이 떨어져 각종 요리에서도 영국보다 훨씬 적게 설탕을 썼다.

노동계층이 급성장하던 19세기에 설탕 소비가 더욱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 노동자들은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의 15~20%를 설탕에서 얻었다(지금도 그러하다).

중세 이래 영국인들은 하루 2끼를 먹었다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하루 3끼를 먹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전개된 이래 급격히 늘어난 영국 노동계층은 이른바 ‘영국식 아침식사(English Breakfast)’를 먹었다. 귀리가 원료인 포리지(porridge: 영국식 죽)와 설탕을 탄 홍차가 중심인 영국식 아침식사는 베이컨과 달걀에 토스트까지 나온다. 이는 몸을 많이 써야 하는 노동자에게 적합한 식사였다. 또한 오후 4시 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비스킷 등과 함께 홍차를 마시는 ‘티 브레이크(Tea Break)’ 관습도 생겼다.

자본가 입장에서 도시 노동자들의 영국식 아침식사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홍차와 커피 가 생활필수품이 되자 노동자들의 위스키, 맥주 등 주류 소비가 줄어들었고 정신이 보다 ‘멀쩡한 상태’에서 노동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제는 설탕, 면화, 커피, 코코아 등의 플랜테이션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특히 설탕 플랜테이션이 노예제를 유발했다.

설탕산업은 매우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을 위해서는 집단노동이 필수이다. 그리고 설탕 제조 과정에서는 시간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사탕수수는 수확한 후 가능한 빨리 분쇄하여 압착기로 가져가 설탕즙(사탕수수원액)을 짜내야 한다. 사탕수수원액을 얻은 다음 보일러에서 끓이면 고체 상태의 갈색 원료당이 나온다. 갈색 원료당을 유럽으로 수출하면 벨기에의 안트베르텐이나 프랑스의 낭트에 있는 설탕 정제공장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제하여 하얀 설탕으로 만들었다.

16세기 이래 압착기의 성능은 엄청 개선되었는데, 이는 노동시간을 더 늘릴 뿐이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노동시간이 하루 20시간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높은 임금을 준다 해도 본국의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 노동자 확보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포르투갈이 개척한 식민지로 이주한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에서보다 사회경제적으로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 육체노동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식민지 원주민 노동력 이용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구입해 부리는 방안을 선택했다.

사탕수수 압착소는 최초로 산업화된 공장이기도 했다. 17세기에 설탕 플랜테이션에는 사탕수수 압착기, 보일러 하우스, 당밀 분리기, 럼주 증류기, 창고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평균 200명의 자유노동자와 노예가 일했다. 이들의 90%는 사탕수수 밭에서 일했으나, 보일러를 다루는 나머지 10%는 매우 전문적인 노동자였다.

지극히 비인도적인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초기부터 있었다. 영국, 미국, 포르투갈 등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1772년 6월 22일 영국 대법원장 맨스필드(Mansfield) 경이 도망 노예 제임스 서머싯(James Somersett)에 대해 “영국 본국에 있는 한 흑인은 노예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약 1만 5천의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고, 이후 영국에 들어오는 노예들도 즉시 자유인이 되었다. 맨스필드 경의 판결은 노예무역을 금지한 것도, 대영제국에 속하는 다른 지역의 노예제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도 아닌 한계가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는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주도하에 버지니아 주가 1778년 최초로 노예무역을 불법화시켰다. 활발히 노예무역을 벌이던 덴마크도 1792년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이 법률은 1803년부터 노예무역을 전면금지한다고 규정했다).

무소속 하원의원으로서 노예무역 금지와 대영제국의 노예제 폐지를 앞장서 주장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1787년 10월 28일 일요일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노예무역 금지와 사회 개혁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목표를 내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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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윌버포스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지도자

1807년 2월 22일 윌버포스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영국 의회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찬성 283표, 반대 16표로 가결했다. 이 법은 기존의 노예는 인정하지만 앞으로 노예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영국은 다른 국가들에도 노예무역을 금지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1810년 체결된 영국과 포르투갈 조약은 포르투갈이 자국 식민지로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크게 제한했다. 1813년의 영국과 스웨덴의 조약은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한 1814년의 파리 조약은 프랑스가 5년 내에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을 규정했다. 같은 해에 체결된 영국과 네덜란드의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노예무역을 불법화시켰다.

1807년 미국 연방의회는 다음해 1월 1일부터 노예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의 노예 교역은 1863년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33년 영국 의회는 노예제 폐지법(Slavery Abolition Act)을 제정하여 노예제를 원천적으로 불법화시켰다. 영국은 노예무역에 힘쓰는 아프리카의 추장, 국왕 등 50여 명의 지역 지배자들과도 노예무역 금지 조약을 맺었다. 영국 정부는 서인도 제도 식민지의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해방에 따른 손실을 보상했는데, 이 때문에 1835년 은행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1,500만 파운드를 빌려야 했다.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이 결실을 맺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영국은 17세기부터 곡물 가격의 지나친 하락을 막기 위해 곡물 수출 장려금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지주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이었는데, 1815년에는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수입법(Importation Act)이 생겨 한층 더 지주 계급이 유리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곡물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를 통틀어 곡물법(Corn Laws)이라 불렀다. 곡물법으로 영국의 곡물 가격은 국제 시세에 비해 매우 높았다. 곡물 뿐 아니라 설탕도 원가의 2배 이상인 보호 관세 때문에 가격이 비쌌다. 이는 카리브 해 영국 식민지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하원의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려는 산업자본가들은 생필품인 곡물의 가격이 떨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곡물 가격 하락을 막는 곡물법에 반대하고 이의 폐지에 힘썼다. 노예제 폐지와 관세 인하는 기득권자로 지주 계급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고 신흥 산업자본가들에게 큰 이익이 되는 정책이었다.

1838년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지인 맨체스터에서 애덤 스미스를 신봉하는 리처드 콥든(Richard Cobden), 존 브라이트(John Bright) 등이 주도하여 반곡물법 동맹(Anti-Corn law League)이 결성되었다. 반곡물법 동맹은 “아침식사를 세금 없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콥든과 브라이트는 1841년의 총선에서 하원의원이 되어 앞장서서 곡물법 폐지를 주장했다. 1843년에는 반곡물법동맹의 도움을 받아 제임스 윌슨(James Wilson)이《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를 창간했다. 이 경제주간지는 곡물법 폐지에 앞장섰다. 1844년 설탕에 대한 관세는 30%로 대폭 인하되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이 폐지되었다. 이는 자유무역의 승리요 산업자본가의 승리였다. 노예제 폐지, 곡물법 폐지, 설탕 관세 인하의 배경에는 ‘값싼 아침식사’를 확보하여 저임금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노예제 폐지법이 시행되자 카리브 해의 영국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차츰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등 아시아 출신의 계약노동자로 노동력을 대체했다. 그러나 노예제가 유지되는 브라질이나 쿠바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브라질이나 쿠바가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파산할 것이므로 노예제를 유지하는 나라들에서 생산된 설탕의 수입을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콥든은 이렇게 비꼬았다.

 

우리 영국인은 (노예가 생산한 면화로 만든) 면제품을 소비하고 있으며 그것을 수출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가 수출용 면제품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일부러 브라질 땅에 들어가, 브라질에는 노예제도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크게 놀라는 모습을 연출한 다음 눈물을 글썽이며 “노예제에 의해 재배된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설탕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시치미를 뗄 권리가 있습니까?

 

영국 설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영국은 다른 나라의 노예제를 폐지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 의회가 노예무역을 금지한 이후 영국 해군은 노예무역은 해적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선언하고는 다른 나라의 노예 수송 선박을 나포했다. 1807~1860년 사이 영국 해군은 노예무역선 1,600여척을 나포해 15만 명의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

영국 의회는 1845년 애버딘 법을 제정했다. 브라질을 겨냥한 이 법은 공해 상에서 노예 교역선이 발견되면 즉각 나포하여 영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규정했다. 애버딘 법이 공포되자 영국과 브라질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영국 해군이 브라질 영해에까지 들어와 브라질 각 지방 간의 노예 교역선마저 단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브라질에 대한 주권 침해였으나 노예제에 반대하는 대중 여론 때문에 브라질 정부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1850년 브라질 정치가 에우제비우 지 케이로스(Eusébio de Queiros)가 주도하여 노예 교역 금지법이 브라질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브라질 농장주들이 이주민 노동자 고용이 노예 구매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도 이 법의 통과에 일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 밀무역은 계속되었다. 영국 해군의 끈질긴 단속으로 브라질의 노예 밀무역은 1860년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1870년 스페인 정부는 모레 법(ley de Moret)을 공포했는데, 1868년 9월 이후 태어난 스페인 식민지의 모든 어린이들을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스페인 정부는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1인당 125 페세타(peseta)를 주어 보상했다.

1871년 2대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2세는 자유출생법(lei do ventre livre)을 공포했다. ‘법안 발효 이후 브라질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누구의 노예도 아니다’라고 규정한 이 법에 따라 노예의 자녀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 노예의 자녀들은 8세가 될 때까지 그들 어머니의 주인이 관리하도록 하고 이후에는 주인이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거나 21세까지 노역을 시킬 수 있는 권리 중 선택하도록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노예가 사라질 것이라는 인식하에 이 법이 만들어졌으나 공화주의자들은 기다릴 수 없었다. 브라질의 커피 농장주들은 사탕수수 농장주들에 타격을 주기 위해 노예제 즉각 폐지를 주장했다. 브라질의 커피 재배는 대부분 영국의 노예무역 금지 이후 시작되었으므로 설탕 산업보다 노예에 덜 의존하고 있었다. 커피 농장주들은 주로 저임금을 받는 이민 노동자들을 고용해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커피 농장주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상 파울루 공화당은 1887년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또한 2년 내에 당원 소유 커피 농장의 노예를 해방시키기로 결의했다. 같은 해 브라질 군부도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수치스러운 임무를 철회해달라고 동 페드루 2세에게 요청했다.

결국 1888년 보수당이 제출한 노예제를 즉시 전면 폐지한다는 황금법(Lei Aurea)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섭정인 이사벨 공주가 서명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노예 소유주에 보상을 해주지 않았으므로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정 폐지를 주장하던 공화주의자에 합류했다.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군 장교들도 반란에 가세해 1889년 11월 동 페드루 2세는 유럽으로 망명하여 브라질 제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신생 브라질 공화국은 노예제를 허용할 수 없었다. 대신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장려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민자들을 옥죄는 계약상의 여러 가지 의무 조항을 폐지하고 자유 소작인 계층을 만드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브라질로의 이민자 수가 1888년 이후 급격히 늘었다. 주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로 이민 왔는데 곧 일본과 중국인 이민도 많아졌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이민 온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대체했다.

 

 

사탕무의 보급

 

사탕수수는 열대작물이므로 열대에 식민지가 없었던 유럽 국가는 설탕을 전량 수입해야 했다. 후발 근대국가로 카리브 해에 식민지를 보유하지 못한 프로이센은 온대 지방에서 설탕을 생산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16세기에 프랑스의 토양학자 올리비에 드 세레(Olivier de Serres, 1539~1619)는 설탕 시럽을 만드는데 사탕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탕무는 괴경(塊莖: 땅속줄기의 일부로 영양물질을 많이 함유)에 자당(蔗糖, sucrose)을 다량 함유한 식물인데, 온대 지방에서 자란다. 올리비에는 “사탕무 뿌리를 끓이면 설탕 시럽과 비슷한 즙이 나오는데, 주홍색이라서 보기에 좋다.”라고 기록했다.

1747년 프로이센의 화학자 마그라프(Andreas Sigismund Marggraf, 1709~1782)는 사탕무로 설탕을 생산할 수 있으며 알코올을 이용해 추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마그라프의 제자인 프란츠 아샤르(Franz Karl Achard, 1753~1821)는 1784년부터 그의 농장에 여러 종류의 사탕무를 심으며 상업적 설탕 생산을 연구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재위 1797~1840)의 후원으로 1801년 프란츠 아샤르는 질레지아의 굿 쿠네른(Gut Kunern)에 세계 최초의 사탕무 정제소를 세울 수 있었다.

1802년 이 정제소는 사탕무 400톤을 정제했다.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는 바람에 사탕수수를 정제한 설탕을 수입할 수 없게 된 프로이센에서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 생산의 중요성은 매우 커졌다. 프랑스 역시 영국의 해상 봉쇄로 카리브 해 식민지에서 설탕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나폴레옹도 사탕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과학자들을 보내 아샤르의 정제소를 조사하게 했다.

1811년 나폴레옹은 100만 프랑을 들여 설탕 학교를 여럿 세우도록 하고, 이듬해에는 농부들에게 사탕무 생산을 의무화시켰다. 이후 유럽에서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는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주요 생산국이었다.

1837년 프랑스는 542개 공장에서 3만 5천 톤의 사탕무 설탕을 생산하여 세계 1위가 되었다. 1840년 전 세계의 설탕 생산 중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는 비중은 5%가 되었다.

1880년 무렵에는 독일이 사탕무 설탕 생산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때부터 사탕무 설탕 생산량이 사탕수수 설탕 생산량을 능가했다. 이는 노예제 폐지로 사탕수수 설탕 생산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탕무 설탕 생산에 정부의 지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줄고 이민 노동자들을 이용해 사탕수수 농장이 노동력을 확보하게 되자 다시 사탕수수 설탕 생산이 사탕무 설탕 생산을 능가하게 되었다(인도양과 오세아니아 지역에 새로운 사탕수수 재배지가 생긴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2009년 현재 세계 설탕 생산에서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1%이다.

 

2009년 사탕무 설탕 생산 국가별 순위(세계 사탕무 설탕 생산 총량은 2,282만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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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사탕수수 설탕 생산 국가별 순위(세계 사탕수수 설탕 생산 총량은 1억 7천 4백만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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